한국을 할퀴고 휩쓴 위대한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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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할퀴고 휩쓴 박정희 가계도

● 유신 독재는 혹독한 인권 탄압 시대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5.16 쿠데타는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2012.07.16일 밝힌 것과 관련해 정치계의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김문수 경기도 도지사는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을 뽑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선거로 하는 것이며, 탱크를 가지고 한강을 넘어서 정부를 접수한 것은 쿠데타”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헌법과 정부를 총칼로 유린하고, 권력을 찬탈한 그 행위가 쿠데타인 것이며, 5.16군사쿠데타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면 한일(韓日) 합방과 6.25 한국 전쟁도 후손들이 그때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 박정희 유신 독재는 장기 독재 체제이며, 가장 혹독한 인권 탄압 시대이다”라고 질타했다.

● 정재(政財)계에 드리워진 패착(敗着)의 고리

대한민국에 그물망처럼 드리워진 박정희 인맥과 그들의 정경(政經) 유착에 의해 그 더럽고 치욕스런 패착(敗着)의 고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별받고 상처받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들만의 기득권으로 19년간 대한민국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았고, 한국의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것이 박정희 가문이다.

박정희가 검소하고, 역대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고, 친인척을 멀리했다는 소리들을 그렇게 하는데, 모두가 다 거짓말들이다. 죽을 때까지 이 나라에서 천황(天皇) 노릇으로 살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정수장학회(正修?學會) 얘기는 듣지도 못했나? 그 문란했던 사생활을 보고도 검소하고 청렴하다는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나? 친인척을 멀리하기는 뭘 멀리해? 친인척은 있는 대로 모두 끌어다 한 자리씩 줬다!

■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오빠인 육인수

그는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5선 의원을 지냈다.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냈고, 충청 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 박정희의 처조카 김종필

박정희의 처조카인 김종필은 1970년대에 이후락 등과 함께 부정 축재한 재산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환수 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었다. 1980년에 887억원이면, 그것은 계산이 불가능한 천문학적인 돈이다. 이래도 박정희 정권이 깨끗하고 청렴했던가?

■ 박근혜가 지배했던 정수 장학회(正修?學會)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부산 일보, 문화 방송 (MBC 방송국) 지분을 강탈(强奪)했고, 이를 기반으로 정수장학회(正修?學會)를 세웠다. 바로 박근혜가 강탈된 사유 재산의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급여를 받았다. 강탈한 재산은 환수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후광이 아니라면 박근혜가 어떻게 정수장학회(正修?學會)를 지배하고 있겠는가? 겉 포장만 번지르하게 장학회(?學會)이지, 그 규모가 무려 1조 300억원에 이른다.

정수(正修) 장학회는 현재 MBC 방송국 지분 중 30% 그리고 부산 일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경향 신문 사옥 부지 역시 정수 장학회의 소유이다. 강탈(强奪)했던 재산이다. 정수(正修) 장학회의 전신(前身)은 고(故) 김지태씨가 설립한 부일(釜日) 장학회이다. 그는 삼화고무와 부산 일보 등을 운영했으며 2, 3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국가 재건 최고회의’에 부일(釜日) 장학회를 강제로 헌납하도록 했고, 부일(釜日) 장학회는 그 뒤 박정희(正) 대통령과 육영수(修) 여사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정수(正修)장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박근혜는 이사장직을 계속 맡고 있다가 2005년 물러났고, 박근혜의 측근 최필립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 박근혜 외사촌 정영삼, 특혜로 수천억 재벌

박근혜 후보의 외사촌 형부 정영삼 씨가 한국 민속촌을 인수한 후, 수천억 대의 부동산 재벌이 됐다. 그 후, 박근혜 후보 조카들(정원석. 정우석)에게 경영권 승계 및 재산 이전이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금을 납부하지 않기 위해 온갖 편법과 탈법을 사용했다.

한국 민속촌은 1974년 개촌 당시 14억 1200만 원이 들었던 국책 사업이었으며,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건립과 운영에 깊숙히 관여했었다. 그런데, 정영삼 씨에게 단돈 2억 에 넘겼다. 그가 한국 민속촌을 관리하게 된 사유는 오직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친인척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한국 민속촌 일부는 골프장으로 변경되고, 그의 재산은 수천억으로 증식되어 부동산 재벌이 됐다.

■ 박근영이 지배하고 있는 육영 재단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또 어떻게 육영 재단(育英財團) 이사장을 맡고 있겠는가? 육영 재단(育英財團)도 역기 수천 억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둘째 딸 박계옥의 남편 김용태를 그 막강한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무슨 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을 치겠는가?

■ 박정희 부인 육영수의 조카 사위, 한승수

한승수는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사위이다. 한승수의 장모가 육영수의 큰 언니 육인순이다. 그러니까 박근혜에게 한승수는 사촌 형부이다. 한승수의 장인은 홍순일인데, 홍순일의 사위들 세명이 모두 국회의원이 됐다. 서주 산업의 회장이 바로 홍순일의 다섯째 사위 윤석민이다.

전국민이 뻔질나게 소풍가는 한국 민속촌 회장 정영삼도 육인순의 사위로서 육영수의 조카 사위이다. 어쨌든 이렇게 오만가지 요직은 다 해 먹었는데 무슨 박정희가 친인척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동양 제철 화학 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손녀 이희현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동양 제철 화학 그룹 명예회장 이회림과 한승수가 사돈을 맺은 것이다. 어쨌든 한승수 같이 유엔 총회 의장까지 지낸 학벌 좋고, 경력 좋은 사람이
부인까지 데리고 가서 박정희를 추모하고 애도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깜빡 속아 넘어 간다. 하지만, 한승수는 박정희의 조카
사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각종 기업 경제에 뻗쳐있는 박정희 친척

군사 정권 시절 박정희 대통령 가족과 재계가 곧잘 사돈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가맥(家脈)은 정몽구 현대 자동차 회장과 허동수 GS 칼텍스 회장에까지 닿아 있다. 현대 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김세연 의원, 박태준 회장을 거치며 혼맥(婚脈)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상희(박정희의 형)의 막내 딸 박설자는

벽산 그룹 창업자 김인득의 아들인 김희용과 결혼했다. 김희용은 현재 벽산 계열인 동양 물산 기업 대표 회장이다.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 김희철은 현재 벽산 그룹 회장이다. 박설자로 말미암아 박정희 집안이 드디어 그랜드 경제 그룹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김희철의 부인, 그러니까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는 현재 LG 그룹의 한 축인 삼양 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이다. 허영자의 조카 사위, 그러니까 허영자의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朝鮮日報)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이다.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인 허영자의 오빠가 현재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인데, 그의 딸 허정윤의 남편은 현재 강원 산업 회장인 정문원의 아들이다. 그리고, 정문원의 부인 최금자의 언니가 바로 최금숙인데, 바로 얼마 전에 형제의 난을 일으킨 두산 그룹 회장 박용오의 부인이다.

정문원의 동생이 정도원인데, 정도원의 큰 딸 정지선은 기아 자동자 회장인 정의선과 결혼했다. 정의선은 현대 자동차 정몽구의 회장의 외아들이자 정주영 회장의 손자이다. 정도원의 작은 딸 정지윤은 포항 제철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성빈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포철 박성빈이랑 현대 정의선이랑 동서가 된다. 박성빈의 매형 김형수는 한국 맥도널드 사장이며, 국내에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 렉서스를 수입 판매하는 렉서스 K모터스 대표이다.

김형수의 형인 김진재는 총력 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부산 동래구 새마을 지도자 연합회 고문, 민정당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 의원이 되었다.

박태준의 사위 중 튀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가 있는데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김병주는 김병주는 쌍용 정보 통신을 꿀꺽 하더니, 5000억원을 쏟아 부어 한미 은행을 먹어 치운 후, 씨티 은행에 27억달러에 팔아 먹었다. 하나 은행마저 잡아먹기 위해 공을 들였다. 요즘 김병주는 칼라일 간부 5명과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를 만들어서 돈을 긁어 모으고 있다. MBK는 마이클 병주 김의 약자이다. 삼성 생명, 대우 정밀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인물은 민주 개혁 세력이 끊임없이 눈여겨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박정희의 실제적인 큰 딸 박재옥

사람들이 박근혜가 큰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박재옥이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이다. 박재옥은 한병기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한병기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뉴욕 총영사관 영사가 되었다. 35살의 나이에 건설 공제 조합 이사장이 되기도 했다. 선주 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 관광 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유엔 대사,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공화당 총재 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사촌 동서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득세하자, 방송 개혁 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자문 위원장이 되었다.

■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

박재홍의 작은 아버지가 바로 박정희이다. 28살의 나이에 포항 제철 행정실장이 됐고 32살의 나이에 동양 철관 회장이 되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인가? 민정당, 민자당에서 국회의원을 4번씩이나 해 먹었다. 그 후, 자민련으로 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갔다가 국민회의로 건너오는 등 이상한 정치 행각을 보여 주었다.

■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은 연필 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 전기 기업 회장이 되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 같은 사람이 그 회사에서 이사로 지냈다가 나온 것을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이다. 또한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는 벽돌 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 육운 회장이 되었다.

■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이 박준홍의 누나이며, 박준형은 불과 30살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 조정실장이 되었다. 세상에 그것이 가능한 얘기인가? 그러더니 32살 때 그 막강한 대한 축구 협회장이 되었다. 그는 박정희 사망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 매형 김종필이 만든 자민련에 들어가서 지금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정희가 친인척에게 엄했고, 공사 구별이 철저했다는 소리는 모두 거짓말이다.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지! 친인척에게 해 줄만큼 과분하게 해 주었고, 해 먹을 만큼 다 해 먹었다. 이명박은 박정희 열혈 추종자이고, 국무 총리 한승수는 박정희 조카 사위이며, 박근혜의 사촌 형부가 되는 셈이다. 박정희는 노골적으로 지배했고, 이제는 은밀하게 지배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참조: 한국을 움직이는 박정희의 인맥 (아고라즐보드) (서프라이즈, 애체)]

독립군 토벌했던 박정희 패륜 행적

다음은 위키(WIKI) 백과 사전의 내용을 뼈대로 하여 작성한 역사적 자료들이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陰 09.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龜尾)면 상모리 출생이며, 제 5.6.7.8.9대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어머니는 45세의 나이로 박정희를 임신하였고, 딸과 며느리가 모두 임신 중이었으며,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박정희를 낙태(落胎)하기 위하여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 섬돌에서 뛰어내리기, 장작더미에서 곤두박질 치기, 갯버들 뿌리 달여 마시기, 물레방아 위에서 뒤로 넘어지기 등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구미(龜尾) 공립 보통 학교 시절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 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 라고 동창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 박정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소년 시절에 군인을 무척 동경 했다” 라고 했다. 그 시절 대구(大邱)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 학교 시절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Napoleon)을 숭배하였다.” 라고 회상하였다.

1932년 구미(龜尾)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大邱) 사범 학교에 입학한 후, 1936년 04월 01일 20세의 나이로 3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경북 선산군의 부잣집 딸이었으며, 훤칠하고 늘씬하게 예뻤다고 한다. 1937년 03월 그는 21세의 나이로 대구 사범 학교 졸업했고, 그 해 04월에 문경 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사로 근무했으나 학교 교장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 그래서, 만주(滿洲)로 가고자 했고, 군인(軍人)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찾아간 곳은 만주의 독립군(獨立軍)이 아니라 일본(日本)의 만주군(滿洲軍)이었다. 1939년 03월 그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으나,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다.

1940년 04월 01일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할 수 있었고, 1942년 3월 25일 1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였다. 대구(大邱) 사범 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꼴찌’까지 떨어졌지만,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간 뒤에는 늘 우등생이었다. 1944년 03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고,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하였으며, 만주 보병 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일본군 중위(中尉)로 근무했다.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는 ‘일본군의 충실한 장교’로 착실히 복무했다.

1939년 03월 박정희는 일제(日帝) 만주국(滿洲國)의 만주 군관 학교에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는데, 1939년 03월 31일자로 발행된 만주(滿洲) 신문에 따르면, 박정희(朴正熙)는 만주 군관 학교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 서류 중에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한 혈서(血書)와 일본군 지원을 호소했던 편지(便紙)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서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 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한 혈서(血書)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만주(滿洲) 신문 1939년 03월 31일자 기사의 박정희(朴正熙)가 일본군 지원을 호소했던 편지(便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
일본인(日本人)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滿洲國)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朴正熙)는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였다. 첫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만주 군관 학교 2기생 졸업 앨범에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그 후, 그는 또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것이 바로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두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 군관 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으며,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완전히 일본 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또 한번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 건국대학교 김병태 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에서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였다”고 설명하였다.

중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아이필드 출판)에서 박정희(朴正熙)가 일본의 육군 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08월 24일 그는 일본군(日本軍)으로서 동북 항일 연군(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퇴했고, 이 후에는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나섰는데, 동북 항일 연군의 토벌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군관 학교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朴正熙)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4년 03월 28세의 나이로 만주군 보병 제8단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고, 1944년 04월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45년 07월 10일에 만주군 중위(中尉)로 승진함과 동시에 만주(滿洲) 동북부의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주된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八路軍)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군 투사들이 주로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하였고, 박정희(朴正熙)가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獨立軍)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다.

박정희는 문경(聞慶)으로 돌아와 문경 보통학교 교사 시절에 자신을 핍박하였던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滿洲)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聞慶)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 보통학교 아래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1944년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少尉)로 임관하였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1961년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되었다. 박정희(朴正熙)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08월 15일 광복이 되자 만주 보병 제8단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1945년 0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중국(中國) 베이징(北京)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광복군(光復軍)에 편입되었다. 세 번째의 변신(變身)이었다. 일본군(日本군) 장교로서 일본에 충성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했던 박정희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갑자기 광복군(光復軍)으로 변신(變身)하였다. 박정희는 철저한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였고, 욕심이 많은 인간이며 패륜아(悖倫兒)였다. 그는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05월 08일 미군(美軍)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05월 08일,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1946년 09월 조선 경비 사관 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14일 졸업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소위(少尉)로 임관한 박정희는 강원도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美軍)이 38선 경비 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 초소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이 시절 국군의 연대 단위 기동 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육군 대위(大尉)로 진급했다.

그 뒤 육군 소령(少領)으로 진급, 1948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공산당(共産黨)의 남한 조직인 남로당(南勞黨)의 한국군 조직책이었던 박정희(朴正熙)는 여수. 순천 14연대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에서 그동안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 들통 나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되었다. 그는 공산당 세력이 사회를 지배할 것 같았고, 공산당(共産黨)의 세력이 확장되니까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여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철저한 기회주의자였다. 그는 1945년 이후 남로당(南勞黨)에 입당하여 공산당(共産黨)의 한국군 하부 조직책으로 일해 온 것이었다. 그는 그의 형 박상희에게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형 박상희는 1946년 10월 01일 공산당(共産黨) 좌익(左翼)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박정희(朴正熙)는 간첩 활동의 핵심 역할 죄목으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실형을 면하게 된 그는 1949년 01월 백선엽 장군의 배려로 다시 예편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0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이후에 육군 소령(少領)으로 현역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 본부 작전 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0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감행될 때에 육군 중령(中領)으로 진급하고 대구(大邱)로 가는 육군 본부의 수송 지휘관을 맡았다. 1950년 10월 25일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이승만 정권에게 앙금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군사 반란을 시도했지만, 북한군과 전투 상황이었기에 그의 상급자들이 박정희를 무마시켜서 군사 반란(反亂)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다.

1953년 11월 육군 준장(准將)으
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 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03월 20일 육군 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小將)이 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07월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01월 부산 군수 기지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0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4·19 의거(義擧)가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고 하였다. 이승만 정권에게 앙금을 갖고 있던 박정희(朴正熙)는 다시 군사 반란(反亂)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60년 05월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하야(下野)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 뒤 허정(許政) 대통령 권한 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 내각을 거쳐 1960년 0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으며, 1960년 08월 12일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한 후, 박정희는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이종찬(李鐘贊)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張勉)을 찾아가 박정희의 중용(重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총리 장면(張勉)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Magruder)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 본부로 박정희의 신원 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金炯一) 육군 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左翼) 빨갱이이다!” 라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張勉)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하였다. 육군 본부 작전 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960년 12월 15일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던 박정희는 윤보선(尹潽善)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던 그는 고급 장성의 부정 부패와 승진의 적체 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下剋上) 풍조를 야기했다. 소장 박정희(朴正熙)와 중령 김종필(金鍾泌)을 중심으로 1960년 09월부터 이미 군사 반란(反亂)을 모의하고 있었으며,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군사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박정희(朴正熙)는 육군 사관 학교 8기생 출신의 전투 보병 사단 중령급 대대장 그리고 6군단 포병단, 제1공수 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군사 정변을 일으키고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하였다. 05월 18일에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張都暎) 참모 총장을 끌어 들여 위원장에 앉혀 놓고, 박정희 자신은 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었던 장면(張勉) 국무총리는 5월 18일 하야를 선언하였다.

1961년 05월 20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이름을 바꾼 후,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장악하였다. 07월 03일 장도영(張都暎)은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위원장에서 퇴진하고, 대신 박정희가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2년 03월 22일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사퇴를 선언하였고, 대신에 박정희(朴正熙)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으며, 결국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대해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부정 선거와 관권 선거로 치러졌다고 주장하며 “내가 사실상 정신적 대통령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옛말에 “물건을 도둑질하면 도적놈이 되고, 나라를 도둑질하면 왕(王)이 된다” 라고 했다. 어쨌든 박정희는 군사 반란(反亂)에 성공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朴正熙)는 군사 정변(政變)을 일으켜 집권한 뒤에는 다시 군대로 원대(原隊) 복귀(復歸)하겠다던 본래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그것을 비판하는 혁명 동지(同志)들을 냉혹하게 모조리 숙청(肅淸)했다.

박정희(朴正熙)는 제 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하면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며 산업화를 일궈냈다. 하지만, 3선 개헌 및 유신 헌법 등의 독재(獨裁)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 운동 세력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숙청했다. 1979년 10월 04일에 박정희(朴正熙)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永三) 의원 제명 파동 등을 주도하였다. 결국, 1979년 10월 16일 부산(釜山)에서 민주 항쟁이 시작되었고, 부산. 마산 민주 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8일 부산(釜山)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부마(釜馬)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급기야 모든 총대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혼자 둘러메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를 총살했다.

박정희(朴正熙)는 1936년 04월 01일 대구(大邱) 사범 학교 4학년 시절에 3살 아래인 17살 처녀 김호남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1937년 11월 24일 김호남은 경북 선산군에서 첫째 딸 박재옥을 낳았다. 식량이 떨어져 온 가족이 밀기울로 끼니를 때우는 시절이었지만 김호남은 박정희와 그의 가족들을 극진하게 모셨다. 1938년 09월 04일 박정희의 아버지가 68세로 사망한 후, 김호남은 경북 구미(龜尾)에서 박정희의 어머니와 박정희의 딸(박재옥)과 함께 살았다. 6년간이나 만주에 있다가 다시 돌아온 박정희는 사관학교 동창 이효(李曉) 대위에게 8살 연하였던 이화 여대 학생인 이현란과의 만남을 부탁했다. 이현란은 몸매가 늘씬하고 이국적인 얼굴이었으며 성격이 쾌활했다. 1948년 약혼식(約婚式)을 올렸는데, 박정희(朴正熙)는 본처(本妻) 김호남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현란(당
시 24세)과 동거(同居)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현란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 김호남과 이혼할 생각을 하고 김호남을
찾아갔다. 남편이 이혼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니, 김호남은 무척이나 서러웠다.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이혼해 주지
않았다. 김호남은 “절대로 내 손으로는 이혼을 안 할 거야! 내가 이렇게 속이 썩었으니, 자기도 당해 봐야 돼!” 라고 했다.

1948년, 박정희(朴正熙) 대위는 조선 경비 사관학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사관학교 관사(官舍)에서 이현란과 동거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자신의 아내(김호남)와 10살 넘은 딸(박재옥)에 대해 한마디도 해 주지 않고 이중 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여수. 순천 사건에 연루돼 감옥 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강원도 원산(元山)시에서 여고를 졸업한 후, 빨갱이가 싫어서 단신으로 남한으로 월남해 왔는데, 빨갱이 마누라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좌익(左翼) 남로당(南勞黨) 전력으로 구속되기 3-4개월 전에 이현란은 아들을 출산했다. 이현란이 낳은 아들은 생후 6개월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현란을 많이 때렸다고 한다. 새벽에 박정희에게 두들겨 맞던 이현란은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맨발로 도망쳐 나오는 일이 잦았다고 하니 그래도 믿음직한 군인이라 믿었던 그에 대한 배신감은 무척이나 컸던 것 같다. 1950년 02월 이현란은 박정희에게 부인과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울 용산에 있는 관사(官舍)에서 박정희와 크게 다툰 후, “그동안 고마웠어요.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나를 찾지 마세요. 나를 찾으러 오면 투신 자살하겠어요!” 라는 메모를 남기고, 1950년 02월 06일 관사를 빠져나와 영원히 가출했다.

1950년 10월 박정희(朴正熙)는 후배 송재천(宋在千)로부터 그의 외가쪽 동생뻘 되는 육영수(陸英修)를 소개 받았다. 육영수(陸英修)는 그 당시 25살이었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사귀면서 김호남에
게 이혼을 제의했다. 마음에 없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느니 서로 헤어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김호남은 꿈에도 이혼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폭력적이었던 박정희에게 김호남은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와 김호남은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했다. 그 후, 김호남과 딸(박재옥)은 구미(龜尾)를 떠나 대구(大邱)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박정희(朴正熙) 대위는 1950년 12월 12일 대구(大邱)시 계산동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陸英修)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1950년 가을에 서울시 신당동 저택을 구입하여 1961년 5.16 군사 정변까지 거주했다. 박정희는 철저한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였고, 욕심이 많은 인간이며 패륜아(悖倫兒)였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에 지관(地官) 지창룡(池昌龍)은 “김대중(金大中) 씨의 생가(生家)가 있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荷衣島)는 용(龍)의 형상이며, 그 앞에 작은 섬이 여의주(如意珠)에 해당한데, 그 여의주를 없애버리면 김대중(金大中) 씨의 정치 생명은 끝장납니다!” 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박정희朴正熙)는 “김대중(金大中) 선산(先山)이 있는 하의도(荷衣島)를 깨뜨려 목포(木浦)시 선착장 공사에 쓰도록 하라!” 라고 지시했다. 그 후, 김대중(金大中)의 정치 역정은 고난(苦難)의 연속이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김대중(金大中)은 1995년 05월 육관(六觀) 도사 손석우(孫
錫佑)가 천선하강(天仙下降)의 명당(明堂)을 잡아 준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자신의 부모 묘를 새로 옮겼다. 육관(六觀)은 이
자리를 써 주면서 “다음 번은 김대중씨가 된다” 라고 힘주어 말했고,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정희(朴正熙)의 정치 탄압은 매우 유명하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 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 해산, 정당 활동 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戒嚴令)을 선포하였으며, ‘유신(維新) 헌법’을 새로 제정한 후,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통하여 대통령(大統領)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박정희 1인 독재(獨裁) 체제를 구축하였다. 대통령 긴급 조치로써 탄압하였는데, 유신(維新) 체제 동안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긴급 조치에 걸려 투옥(投獄)되었다. 김영삼(金泳三) 염산 테러 사건(1969.06.20일),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1973.08.08일), 장준하 시해 사건(1975.08.17일), 인혁당 사건(1974.04월) 등을 통해 무수히 많은 정적(政敵)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고 학살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중앙정보부와 군부가 자행한 고문(拷問)과 테러를 보면, 그것은 불법적 범죄 조직 집단의 폭력 행위 보다 더 잔인(殘忍)하고 포악했다.

박정희(朴正熙)는 1974년 04월 05일 군포 야산에서 식목일 기념 오동나무를 심으면서 말했다. “민청학련 대학생놈들은 순 빨갱이들이야. 잡히기만 하면 모두 총살이야!” 라고 말해서 경기도지사와 기자들을 대경실색케 했다. 실제로 04월 09일, 민청학련(民靑學聯)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잡혀 들어온 인사 8명에게 사형(死刑)이 선고됐고, 다음날 새벽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두 형장(刑場)의 이슬이 되었다.

1979년 10월 04일에 박정희(朴正熙)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永三) 의원 제명 파동 등을 주도하였다. 결국, 1979년 10월 16일 부산(釜山)에서 민주 항쟁이 시작되었고, 부산. 마산 민주 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8일 부산(釜山)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부마(釜馬)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급기야 모든 총대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혼자 둘러메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를 총살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는
좋게 볼 수 없다! 누가 뭐래도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바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을 숨 못 쉬게 했어요.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를 죽이려 염산으로 테러를 가하고, 내 측근들을 연행해 탄압하고 죽이려고 못된 짓을 다 했다.” 라고 말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는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는데, 경북 구미(龜尾) 출신의 김재규(金載圭)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 라고 진술했다.

김재규(金載圭)는 빈번한 소요 사태 발생과 긴급 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 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 수집과 사태 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79년 10월 0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산. 마산 민주 항쟁 등 계속된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유신(維新)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10월 18일 부산(釜山)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부마(釜馬)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김재규(金載圭)는 시국(時局)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과 마찰을 빚고,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애국(愛國) 열사(烈士)의 신념으로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고자 했으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와 차지철(車智徹)을 총살했다. 결국, 그는 1980년 01월 28일 육군 고등 계엄 군법 회의에서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05월 24일 서울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재규(金載圭)는 “내
가 거사(巨事)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釜馬) 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되어 4·19 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다. 차지철(車智徹)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명 못 죽이겠느냐!’라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朴正熙)도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라고 매우 위험한 발언을 했다. 그래서,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거사(巨事)를 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떳떳했고 만민(萬民)을 위해서도 떳떳했으며, 역사적 소명(召命)을 한 몸으로 떠안고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 현충원(顯忠院)에는 박정희(朴正熙) 묘지(墓地)가 안장(安葬)되어 있는데, 다른 대통령 묘지(墓地)의 15-20배의 크기로 박정희(朴正熙)의 묘역은 유달리 성역화(聖域化)되어 있다. 불공평한 안치(安置)인 것이다. 후대에 반드시 시정(是正)되어야 할 것이다.

박정희(朴正熙)는 5·16 쿠데타 직후 “군(軍) 본연의 임무에 복귀(復歸)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얼마 뒤 “3선 개헌(改憲) 않겠다”고 약속했다. 1969년 일요일 새벽 2시 국회 별관으로 자리를 옮겨 3선 개헌안을 불법적으로 통과 시켰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다시는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1972년엔 유신(維新) 헌법을 만들어 영구 집권의 길을 텄다. 유신을 반대한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를 타살하게 만들었다. 고려 대학교 학생들이 반(反) 유신 헌법 시위를 계속하자, 1975년 고려 대학교에 휴교령 내리고, 수도 경비 사령부의 군인과 탱크를 밀어 넣어 학생들 1000명을 연행한 긴급 조치 7호(1975.04.08)나 긴급 조치 9호(1975.05.13)를 발동했다.

독립(獨立) 운동가들이 세웠다가 정부에 헌납당한 대구 대학(1947년)과 청구 대학(1950년)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개인의 소유가 되어 1968년 영남(嶺南) 대학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영남 대학교를 박정희가 세운 학교인 줄로만 알고 그 딸인 박근혜를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영남(嶺南) 대학교 설립시 박정희와 박근혜는 단 한푼의 돈도 내지 않았다. 영남(嶺南) 대학교의 경우와 정수 장학회의 경우는 박정희를 거처 박근혜에게 이어지는 그 수법이 거의 똑같다.

한국 경제 망친 원흉은 바로 박정희!

경북대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朴正熙) 집권기 동안 땅값과 물가 폭등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경제를 구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전국의 땅값(地價) 총액은 박정희의 집권기 (1963년-1979년) 16년 동안 3조 4000억원에서 329조원으로 100배나 폭등했다. 1953년에서 2007년까지 54년 동안 땅값 총액의 전체 상승분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5%가 박정희 정권 때 이뤄졌다. 물가(物價)의 경우도 박정희 정권 때 11.8배나 올랐다. 박정희식 막개발이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켜 후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 군사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역대 정권이 부동산을 어떻게 관리 했는지 연평균 땅값 상승률 통계를 보면, 박정희 정권 때에 33.1%를 보여 매우 높은 상태에 도달했고, 민주주의 정권에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권 때 4.3%를 보이며 땅값이 안정되었다.

또한, 연평균 물가 상승률을 보면, 이승만 22.7%, 박정희 14.7%, 김영삼 5.0%, 김대중 3.5%, 노무현 2.9%였다. 독재 정부 때에 물가가 한없이 상승했었고, 민주 정부 때에 물가가 안정되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전국 지가(地價)가 180배 이상 상승했고, 토지 불로 소득이 국민 소득의 무려 2.5배나 됐다. 불로(不勞) 소득의 천국이었고,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극치였다. 2012년 우리나라 평당 땅값은 세계 1위인데,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대에 대부분의 지가 상승이 일어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합해서 2% 정도 책임이 돌아갈 뿐이다. 한국의 땅값을 세계 최고로 만든 책임의 50%는 박정희 정권에게 있다.

물가(物價)는 또 어떤가? 한국의 물가는 세계 1위군에 속한다. 물가(物價)가 비싸니까 수출도 불리하고 관광객 유치도 어렵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 시대에 물가 상승의 거의 대부분이 일어났고, 특히 박정희 정권 혼자서 물가 상승의 45%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 정부 책임은 합계 10%밖에 안 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지가(地價)와 물가는 독재의 유산이며, 특히 박정희의
책임이 가장 크다. 높은 지가와 물가는 중산층, 서민, 노동자, 자영업자의 생활고를 가져오는 주요인이며,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고 두고 두고 괴롭힐 것이다. 높은 지가(地價)와 물가(物價)는 수출 주도형 한국 경제에 치명적 장애물이다.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했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경북대 이정우 교수는 “우리 사회가 좋은 성장, 올바른 경제 구조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Germany)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던 히틀러(Adolf Hitler)가 복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간 이후부터는 일부 파시즘(fascism) 추종 세력에게서만 추앙받게 된 예처럼, ‘더 좋은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한계라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現代史)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흑백(黑白)을 구분하지 못하고 독재 정권의 해악(害惡)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961년 05월 16일 새벽 3시의 5.16 쿠데타! 이 치욕(恥辱)의 날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군사 정권을 미화(美化)하거나 찬양하는 나라는 문명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박정희(朴正熙) 경제는 결국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켰고, 재벌과 결탁한 방식의 정경(政經) 유착 체제를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관치 금융을 구조화했고, 강압적 노사 개입을 강행했으며,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다.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재벌 독식, 양극화 경제, 관치 금융 경제 같은 문제의 뿌리는 바로 박정희 정권 때문에 고착화 되어 왔다.

군사 독재 정권은 장기적 관점을 갖고 양심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성과(成果)에 급급하므로 경제를 잠시 흥청거리게 하고, 거시(巨示) 경제를 망친다. 독재가 경제를 살린다는 속설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민주주의가 책임 의식을 갖고 경제를 제대로 운용한다.

경북대 이정우 교수는 “2011년 학교 무상(無償) 급식(給食) 논쟁이 일었을 때 대통령, 총리, 재정부 장관 등 모두 일관되게 ‘복지 포퓰리즘(populism)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경제가 무너진다!’고 했었다”며 “무상 급식을 시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는커녕 일자리가 생겨나고, 아이들이 모두 굶지 않고 밥을 잘 먹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정희(朴正熙) 재임 기간(1963-1979)의 무역 적자 규모가 233억 달러였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 규모인 것이다. 결국,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의 차관(借款)을 끌어다가 돌려 막기에 급급했다. 쉽게 비유하면,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 돌려 막기 경제였고, 만성적인 적자 구조 경제였다.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 대고 나서 그걸 다시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였다. 그래서, 박정희 임기 내에 국가 부도 위기가 10번 정도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 없었으면 한국은 아마 총체적 국가 부도를 맞이했을 것이다.

1962년도 무역 적자 규모가 5천 5백만 달러였는데, 1971년에는 5억8천2백만 달러, 1974년에는 20억 달러, 1979년에는 30억 달러로 상승했다. 결국 외국 차관(借款)으로 무역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 부채 돌려 막기 경제가 계속 반복되었다.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등이다.

전두환(1980.09-1988.02) 대통령이 지금도 큰소리 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권 기간 중에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1980년대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이라는 천혜의 외부 환경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대중(1998~2003) 대통령은 김영삼(1993-1998) 정부로부터 1997년 IMF 경제 파탄 상황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5년 동안에 846억 달러라는 최고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으니, 경제 운영을 매우 잘 한 것으로 평가된다.

 

“박정희(朴正熙)는 일제(日帝) 때에 일본(日本)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獨立軍) 토벌에 참여한 일본군(日本軍) 장교였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남로당(공산당) 간부로 활동했는데, 1961년 5.16 쿠테타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던 장준하 선생은 결국 감옥에 갇히고 암살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당시 제거되지 않았던 친일파(親日派)가 오늘날 기득권이 되었다.